본문 바로가기

대한의 혼

서양 실증주의 사관과 우리 민족 스스로에 의한 역사 왜곡 : 양독洋毒,사대주의

19세기 초에 생겨나 19세기 후반, 유럽과 아시아 등 여러 나라로 확산되어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서구의 실증주의 사학은, 문헌과 고고학으로 확인되지 않는 역사 기록은 인정하지 않는 유물物주의, 과학주의 사학이다. 심지어 고고학적 발굴로 증명되지 않으면, 고대 문헌의 기록을 부정하기까지 한다.
그러다 보니 실증주의 역사학은 개개 사건의 사실 입증에만 정신을 송두리째 앗겨 대자연의 변화에 따라 전개되어 온 인간 역사의 대세와 그 근본정신을 보는 데는 너무도 무력하다. 또 역사의 주체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을 배제한 역사해석에 빠져 인간 정신사의 맥을 완전히 무시한다.

또 하나 지적해야 할 실증주의 사학의 문제점은 사료의 범위를 너무 좁게 잡는다는 것이다. 공인된 문헌이나 고고학 유물만 사료로 보는 것은 편협한 태도이다.

이렇게 볼 때 수백 년 이상 민간에 비전되어 온 우리의 전통 사서도 비록 100 퍼센트 완벽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역사적 전승과 진실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사료로 이용되어야 마땅하다. 

특히 상고사의 경우 어느 나라나 문헌 사료가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기존의 자료를, 그 신뢰성에 다소 의문의 여지가 있다 하더라도 열린 태도로 검토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이러한 면에서 실증주의 역사학은 지나치게 편협한 태도로 일관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실증주의 사학은 1920년대 이후 식민사학에 의해 이 땅에 이식되어 한민족사 말살과 왜곡의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지금까지 여전히 역사학계의 대세가 되었고, 여기에 편승한 이 땅의 강단사학자들은 한민족의 뿌리 역사와 시원문화에 대한 사료를 거의 대부분 수용하지 않고 부정한다.

 

유교 · 불교 · 기독교에 의한 역사 왜곡

유교에 의한 역사 왜곡
공자가 주창한 유교는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요 그 밖의 만족은 중국에 예속된 오랑개에 불과하다는 중화주의를 내세운다. 유학을 국가 동시 이로 남은 고려와 조선의 존화 사대주의자들이 이 중화주의 사관을 대로 하나 올리 역사에 끼친 해악은 너무나 심각하다.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고구려를 계승한 대진의 역사는 완전히 지워버린 반면, 같은 시대 신라 역사는 망하는 날까지 세세히 기술하였다. 그러면서도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은 사대정신에 위배된다고 비판하였다

유교를 국교로 신봉한 조선은 개국초에 「춘추」와 「자치통감 강목』만 사필史筆로 여기고, 한민족의 고유 사서를 이단異端이라 하여 모조리 압수·소각하였다. 태종은 서운관書雲觀에 보관되어 있던 고유 사서를 공자의 가르침에 어긋난다 하여 소각하였고, 세조에서 성종까지 3대에 걸쳐 임금이 전국 관찰사에게 사서 수거령을 내렸다. 이렇게 하여 우리의 정통 사서가 소실된 것은, 오늘날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인식하는 데 결정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한민족사를 연구하면서도 중국측 사료와 이 땅의 사대주의 사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 광해군 때 청 태조 누루하치가 보낸 국서를 보면 조선의 사대 근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그 국서에서 누루하치는 “요동은 본시 너희 조선의 땅이다. 지금 명나라 사람들이 그 땅을 빼앗았는데, 너희는 명나라가 원수인 것도 모르고 도리어 신복하고 있다"라고 하면서 조선을 비웃었다.

그리고 더욱 가관인 것은 조선 유학자들이 보인 열렬한 모화慕華정신이다. 이것은 진실로 한국사의 뿌리를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망국멸족亡國威族의 표본이다. 

서경천도 운동은 단재 신채호가 [조선 역사 일천 년 이래 가장 큰 사건一千年來一大事件] 이라고 평가한 민족중흥 운동이다. 단재는 한국의 고유한 사상을 낭가사상으로 보고 이 낭가사상의 성쇠가 곧 민족사의 성쇠를 좌우했다고 보았기 때문에 묘청의 민족중흥 운동을 가장 크게 평가했다. 묘청의 서경천도운동' 이 실패함으로써 환국-배달 고조선으로 계승되어 온 한민족 고유의 낭가郞家사상은 그 명맥이 거의 단절되었다. 대신 존화 사대주의 사상만 더욱 강화되었다.

최만리는 훈민정음 제정 반대 상소를 올리면서 “조종 이래 지성으로 중국을 사사師事하고 모두가 중국 제도를 본받아 왔는데 만약 훈민정음이 중국에 전해지는 날에는 사대모화에 부끄러운 일이라" 라고 하였다. 동방의 명현이라 불리는 이퇴계 조차 명을 '본조本朝 , 즉 '우리나라 조정' 이라 불렀다. 또 우리의 역사에 대해 “단군 시대는 아득한 태고 시대라 증명할 수 없고, 기자가 봉해지고 나서야 겨우 문자를 통했다. 삼국 시대 이전은 별로 논할 만한 것이 없다" 라고 하였다.(대동아승, 기묘록별집)

이율곡 또한 명나라 군주를 '우리 황상皇上’ 이라 하고, 명나라 조정을 '천조天朝 또는 '성조聖 라 불렀다.(율곡전서)

그리고「기자실기箕子實記」를 지어, “기자께서 조선에 이르시어 우리 백성을 천한 오랑캐로 여기지 않고 후하게 길러 주시고 부지런히 가르쳐 주셨다. 우리나라는 기자에게 한없는 은혜를 받았으니 그것을 집집마다 노래하고 사람마다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단군의 출현은 문헌상 상고할 수 없다"(기자실기)

라는 한마디로 한민족의 상고 역사 전체를 부정하였다.

최인은 이 같은 행태를 두고 “조선은 한일합병으로 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전에 한중합병으로 망하였다” 라고 일갈하였다. (최인, 『한국사상의 신발견, 225쪽.)

불교에 의한 역사 왜곡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고려의 승려 일연은 한민족과 인류의 시원 국가인 환국의 초대 환인천제를 한낱 불법의 수호신으로 둔갑시켰다. 「삼국유사』를 지으면서 “석유환국昔有桓国(옛적에 환국이 있었다)” 옆에 “위제석야帝釋也” 라는 불교 교리에 따른 주석을 달았다. 환국을 '제석釋의 환국' 으로 만들고, 환인천제를 불교에서 받드는 제석환인帝釋桓因이란 신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불교는 정착 과정에서 신교문화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신교의 삼신사상과 칠성신앙이 불교에 흡수되어, 전국 사찰의 삼신각과 칠성각이 되었다. 삼신각은 우주의 조물주인 삼신을 모시던 신교 풍습의 자취이고, 칠성각은 인간의 수명과 복록을 관장하는 칠성에 대한 신앙의 흔적이다. 불교의 명부전 또한 신교 전통을 변형시킨 것으로, 지장보살을 명부대왕으로 앉혀 신교의 원형을 훼손하였다.

또한 불교는, 북부여의 시조인 해모수단군의 건국을 기리기 위해 등을 달아 경축하던 민족 전래의 대축제일인 4월 8일을 석가탄신일로 변조시켰다. 그 까닭은 당시 낯선 인물인 석가의 생일을 한민족에게 친숙한 해모수단군의 북부여 건국일과 동일한 날짜로 함으로써 이 땅에 불교를 빨리 정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단군왕검께서 천제를 올린 유서 깊은 마리산摩利山을 마니산摩尼山이라 하여 불교식으로 개칭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에 의한 역사 왜곡

제3장의 '신교에서 나온 서선西仙, 기독교' 에서 이야기하였듯이, 기독교의 뿌리는 수메르에서 가나안 땅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에 있다. 수메르 문화가 환국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결국 기독교 속에는 동북아 환단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신교문화의 원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그럼에도 19세기 말 개항 이후 서구 물질문명에 편승하여 들어온 기독교는 이 땅에 발을 붙이는 순간부터 한민족의 고유한 정신문화와 시원 역사를 철저히 부정하였다. 환국, 배달, 고조선이라는 삼성조三聖祖의 유구한 역사와 환인천제, 환웅천황, 단군성조를 인정하는 것이 기독교의 유일신관에 배치되기 때문이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이스라엘인의 수호신인 야훼(여호와)를 온 인류의 하나님이자 우주의 유일신으로 섬긴다. 그리고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사라에게서 이삭을 낳고, 이삭은 리브가에게서 야곱을 낳고, 야곱은 레아에게서 르우벤과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불론을 낳고” 라는 「구약전서」과 「신약전서」에 나오는 유대인 족보를 줄줄 외우고 다닌다. 그러면서도 정작 환인, 환웅, 단군은 누구인지도 모르고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설사 알게 된다 하여도 신화 속의 인물로 치부해 버린다.

서울 올림픽이 열린 1988년, 서울시는 단군 성전이야말로 세계에 자랑할 우리의 문화유산이라 하여 사직공원의 협소한 단군 재실齋室을 확대·개축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기독교 단체들이 전국적으로 '단군 성전
건립 결사반대' 라는 붉은 글씨의 현수막을 교회마다 내걸고, 단군은 신화의 인물이고 우상이라면서 당국에 압박을 가한 결과였다.
그들은 이처럼 서울시에서 추진한 문화 운동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10여 년 전에는 전국 초등학교에 세워진 단군 상像의 목에 톱질을 하기도 하였다. 신문 지상에 떠들썩하게 보도된 이 천인공노할 사건을 많은 국민들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단재 신채호는 외래종교, 외래사상에 물들어 역사와 문화를 다 잃어버린 가련한 한민족을 향하여 이렇게 통탄하였다.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밖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 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 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 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단재 신채호, 낭객의 신년만필, 동아일보, 1925.1.2)

우리는 어떤 종교,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든지 선조들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려는 마음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역사가 플럼J. H. Plumb은 「과거의 종말The Death of the Past」에서 “과거의 착취와 구속력에 대한 해방 선언이 과거의 종말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왜곡된 과거의 진실이 밝혀지고 바로잡힐 때, 그리하여 진정으로 과거의 종말이 올 때, 오늘의 현실과 인간의 문제를 바르게 보고 희망찬 미래를 창조적으로 건설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이제 우리는 조작과 왜곡으로 얼룩진 과거에 대해 해방을 선언해야 한다. 그 길은 오직 수천 년 동안 어둠 속에 빠져 있던 역사의 진실을 밝히는 데 있다.

일제에게 유린당한 한민족
조선의 혼과 정기를 말살하라

일본의 침탈 행위는 역사 왜곡과 강탈에 그치지 않았다. 더 나아가 그들은 조선과 조선인을 역사에서 아예 지우고자 하였다. 이른바 민족말살 정책을 실시하여 종교, 언어, 문학, 예술 등 문화 전반에 걸쳐 한국인의 정신과 혼을 말살하려 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수천 년 동안 내려온 조선의 성씨를 파괴하고, 조선말과 조선글을 빼앗고,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성씨는 한 개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한국인은 자신의 성씨를 생명처럼 소중히 여긴다. 일제는 이 점에 착안하여 한국인의 정신적 기반을 파괴하기 위한 책략으로 창씨개명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 정책을 따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불이익을 가하였다. 창씨를 하지 않는 자의 자녀에게 입학과 전학을 불허하고, 창씨를 하지 않는 아동에게 일본인 교사가 이유 없이 질책과 구타를 하였다. 또한 창씨를 하지 않는 자를 징용의 제1 순위로 하고 물자 배급대상에서도 제외하였다.

이 창씨개명과 쌍벽을 이루는 민족말살책이 바로 한국어와 한글 사용의 금지이다. 1938년부터 일제는 모든 학교에서 조선어 교육을 전면 폐지하고 일본어를 '국어' 로쓰도록 하였다. 그 민족의 고유한 언어와 문자를 못 쓰게 한 것은 제국주의 역사상 일제가 유일하다.

일제는 또 한국인을 정신적으로 완전히 일본인화하기 위하여 일본 종교인 신도神道를 한국에 끌어들였다. 전국 곳곳에 신사를 지어 조선인으로 하여금 일본인의 조상에 절하게 만들었다.
일제가 남산에 세운 조선신궁_1920년 5월에 천조대신과 명치왕을 모신 신사를 서울 남산에 세우기 시작한 이후 1925년에는 조선팔도에 신사가 150여 개에 이르렀다. 그 후면 단위까지 신사를 건립하게 하여 광복 직전에는 자그마치 2,229개가 건립되었다(김상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131쪽).

일제는 신사참배를 '모든 국민이 지켜야 할 마땅한 생활규범' 으로 강요하여 한국인의 민족 정서를 철저히 파괴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 강토를 유린하는 패악까지 저질렀다. 바로 조선 산하의 명산과 혈 자리, 심지어 바다 속에까지 말뚝을 박아 천지 정기를 끊으려 한 것이다. 이 쇠말뚝은 땅에 박았지만 사실은 우리의 영혼 속에 박아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한국인 씨를 말리려 한 일본

일본의 한국인 참살 만행은 또 어떠한가?
약자를 억압하여 자신의 힘을 극대화하는 제국주의 사조로 말미암아 6백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고 하는데, 일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무려 8백만명의 한국인을 참혹하게 죽였다.
우선 1894년 갑오동학혁명을 진압하면서 동학군과 양민을 합쳐 최고 30만 명으로 추산되는 조선인을 학살했다. 동아시아 최초의 국제 양민대학살이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수행하고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하여 1894년 6월 5일에 참모본부 내에 군 최고통수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1894년 9월에 대본영을 도쿄에서 히로시마로 옮겨 1895년 7월까지 10개월 동안 일왕이 직접 전쟁을 지휘하였다.
그들의 비밀 문건을 보면, 동학군이 함경도 방향으로 도망하지 못하도록 전라도 방향으로 몰아서 섬멸한다는 치밀한 작전까지 적혀 있다. 그때 일본은 저항하지 않는 동학군과 양민까지 무참하게 학살했다. '우지개' 라 불리는 볏짚으로 만든 농기구를 머리에 씌우고 불을 질러 죽이기도 했다. 동학혁명에서 가장 치열한 싸움이었던 우금치 전투에서는 계곡과 산마루가 동학군의 시체로 하얗게 덮였고 개천에는 핏물이 여러날 흘렀다고 전한다.

이후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이 수없이 죽어갔고, 만주에서는 양민 대학살이 자행되었다. 1920년에 일본군은 3~4개월 만에 조선인 5천 명 이상을 무자비하게 죽였다. 간도 일대에서 자행된 한국인 학살을 지켜본 미국인 선교사는 “피에 젖은 만주 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1875년 느닷없이 강화도와 영종도에 나타나 이른바 '수교'를 요구하며 시작된 학살과 침탈은 1945년 패망 때까지 70년 동안에 걸쳐 끊이지 않고 자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 무고하게 희생되거나 침략전쟁에 동원된 조선인은 어림잡아 8백만 명에 이른다(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13쪽).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일제가 벌인 온갖 만행을 목도한 외국인 언더우드, Underwood(1859~1916, 연희전문학교 교장)는 이렇게 고발하였다. “부인의 다리를 양편으로 벌려 생식기를 검으로 찔러 일신을 사분오열로 가르며, 여자는 이렇게 죽이는 것이 묘미가 있다고 웃으면서 담화하였다. 사람을 전차 궤교 아래 목을 매달고 양다리를 끈으로 묶어 좌우에서 다수인이 끈을 잡고 신호하며 호응하면서 그네와 같이 흔들어 죽인 일도 있다. 신체는 전신주에 묶고 처음 눈알을 도려내고 코를 찔러 그 애통한 광경을 충분히 구경한 후에 배를 찔러 죽인 일도 있다. 기차에서는 다수의 왜놈 등이 사지를 잡고 창밖으로 던져 역살하였고, 남녀 수십 인을 발가벗겨 보행시키고 또 춤을 추게 하여 수시간 동물적 희롱을 감흥시킨 후 찔러 죽인 일도 있었다. 이런 괴악한 수단은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바이다” (김삼웅, 같은 책, 14쪽)

또한 일제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이른바 마루타(통나무)' 라는 암호로 통하던 생체실험을 행하였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731부대가 중심이 되어 세균성 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중국인, 러시아인, 한국인을 상대로 무려 31종류의 실험을 행하였다. 고속원심분리기를 사용해 생사람의 피를 짜고, 사람 몸에 말의 피를 넣었을 때 어떻게 죽는지 관찰하였다. 각종 독가스를 살포하여 얼마 만에 죽는지 측정하고, 페스트와 콜레라 균을 주입시켜 체내 장기에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생체 해부로 알아냈다. 또한 인체의 70% 이상이 수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생사람을 한증막에 넣고 쪄서 수분을 빼는 실험을 감행하고, 사람에게 전혀 물을 안 주고 빵만 먹이면 6~7일째 가서 퉁퉁 부은 채 피를 토하고 죽는다는 것도 알아냈다. 아직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일본의 생체실험은 인류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오늘의 한국인은 민족의 역사가 난도질되고, 당시 한국 인구의 1/3에 달하는 8백만 명이 살해되고, 자칫 민족의 씨종자까지 말라 버릴 뻔했던 참담한 과거를 너무도 쉽게 잊고 산다. 한국인이 일제에게 겪은 수난은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과거의 사건이 결코 아니다. 우리들의 부모형제가 당한 그 고통은 오늘날에도 우리 한민족 정서 속에 깊은 한으로 새겨져 있다.
일본의 생체실험 증거가 서울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다. 2006년에 대학로의 한 공사 현장에서 50~10년 전으로 추정되는 유골 28구가 출토되었는데, 두개골 유골에 톱으로 가운내를 정밀하게 절단한 흔적이 있었다. 당시 근처에 경성의학전문학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일본인이 조선인을 생제 실험한 후 암매장한 것으로 보인다.(KBS 1TV, 〈역사스페셜〉, “조선 사람은 왜 일본 박람회에 전시됐나, 2011.12.8),

 

일제에게 말살당한 조선의 혼과 시원 역사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의 혈사 가 전하는 일제의 만행(EBS, “도올이 본 한국독립운동사" 5부, 2005. 9. 29 방영, 도올 김용옥 번역)은 『한국독립운동의 혈사』에서 일제의 만행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마을의 민가, 교회당, 학교 및 곡식 수 만석을 불 질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남녀노소를 총으로 죽이고, 칼로 죽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목을 졸라 죽이고, 주먹으로 때려죽이고, 발로 차 죽이고, 도끼로 찍어 죽이고, 생매장하기도 하고, 불에 태우기도 하고, 솥에 삶기도 하고, 몸을 갈가리 찢기도 하고, 코를 꿰기도 하고, 갈비뼈를 발라내기도 하고, 배를 따기도 하고, 머리를 자르기도 하고, 눈알을 뽑기도 하고, 가죽을 벗기도 하고, 허리를 자르기도 하고, 사지에 못을 박기도 하고, 손과 발을 자르는 등 인간이라면 차마 할 수 없는 짓들을 저네들은 오락으로 삼았다.
우리 동포들 중에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함께 죽었고, 아비와 아들이 함께 도륙 당했으며, 그 지아비를 죽여서 그 지어미에게 보였고, 그 아우를 죽여서 그 형에게 보였으며, 죽은 부모의 혼백상자를 끌어 않고 도망가던 형제가 함께 떼죽음을 당하기도 했고, 더러 산모가 포대기에 아이를 싸않고 달아나다가 모자가 함께 목숨을 잃기도 했다.”

왜곡된 한국사의 핵심 내용

잘못된 한국사 체계 : 단군조선 →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환단고기」에 따르면, 환국 · 배달 · 고조선으로 시작된 한국의 역사는 9천 년이 넘는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은 환국과 배달의 실존을 전혀 인정하지 않고 BCE 2333년에 단군왕검에 의해 시작된 고조선의 역사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단군조선대신에 중국은 기자조선을, 일본은 위만조선을 고조선 역사의 시작으로 조작하였다. 기자조선은 BCE 12세기 말 중국 상나라 사람인 기자가 세웠다는 조선이고, 위만조선은 BCE 194년에 중국 연나라 출신의 위만이 준왕을 몰아내고 고조선 왕이 됨으로써 시작되었다는 조선이다.

이러한 두 조선은, 한국 역사가 중국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말하기 위해 조작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한국사를 중국에 예속된 역사로 만들기 위한, 중국과 일본에 의한 역사 왜곡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의 강단사학계는 이 두 조선을 그대로 수용하여 고조선 역사를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설명한다. '기자조선은 허구' 라는 주장이 강단사학계 내부에서 제기되기는 하지만, 아직도 기자조선은 여전히 살아 있다.
강단사학은 또한 위만조선을 이어 한사군이 한국을 지배하였다고 말한다. 한사군은 그 사실 여부가 불분명함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학계는 역사적 사실로 굳혔다. 뿐만 아니라 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의 대동강 유역으로 설정하였다.

한국이 인정한 한사군을 중국은 동북공정에 그대로 악용하여 한나라 때 자기네 영토가 대동강 유역까지 미쳤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장차 한국에 큰 정치적 변화가 생겨 영토분쟁이 발생한다면, 한강 이북을 중국의 고토로 주장하겠다는 속셈이 숨어 있다.
서양의 교과서와 학자들은 중국의 동북공정을 묵인하고 동조하여 한국사를 겨우 천 년의 역사로 말한다.

북한은 단군조선만 고조선으로 인정
 남한은 단군 · 기자 · 위만의 삼조선을 모두 인정하여 일본 식민사관과 중국 중화주의 사관의 대변자 노릇을 하고 있음.

 

출처: 환단고기(해제, 안경전 저, 상생출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