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인문학 철학 과학 종교

슈뢰딩거 읽기: 과학은 왜 '나'를 지워야 했을까

 슈뢰딩거 읽기: 과학은 왜 '나'를 지워야 했을까

물리학자가 쓴 책인데 물리 공식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양자역학의 선구자 에르빈 슈뢰딩거가 1956년 케임브리지 강연을 바탕으로 쓴 『정신과 물질』은 "물질로 된 몸 안에서 어떻게 마음이 생기는가"라는 오래된 질문을 다룹니다. 과학자가 과학의 한계를 스스로 짚은 드문 책이라 지금 읽어도 신선합니다. 어렵게 느껴지는 이 책을 철수와 영희의 대화로 풀어 봤습니다.

1. 의식은 '새로운 것' 앞에서 켜진다

철수: 영희야, 『정신과 물질』 읽어 봤어? 제목부터 머리가 아프더라.

영희: 질문 하나만 잡으면 쉬워. 슈뢰딩거는 "의식은 언제 켜지는가?"부터 물어. 그의 답은 새로운 상황 앞에서라는 거야.

철수: 새로운 상황이라니?

영희: 처음 운전을 배울 때를 떠올려 봐. 기어, 핸들, 사이드미러까지 전부 신경 쓰느라 진땀이 나잖아. 그런데 몇 달 뒤엔 음악을 들으며 수다를 떨면서도 운전해. 피아노도 마찬가지야. 처음엔 손가락 하나하나가 의식의 대상이지만, 숙달되면 손이 알아서 움직이지. 외국어도 그래. 처음엔 문법을 따지며 말하다가, 익숙해지면 생각보다 입이 먼저 나가.

철수: 맞아. 매일 다니는 출근길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나.

영희: 더 직접적인 근거도 있어. 뜨거운 냄비에 손이 닿으면 '뜨겁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떨어지잖아. 이미 해결된 반응은 의식 없이 반사로 처리된다는 뜻이야. 슈뢰딩거는 이걸 생명 전체로 넓혀서, 의식이 생명이 '배우는 일'과 이어져 있다고 봐. 환경이 바뀌어 낡은 반응으로는 감당이 안 될 때, 아직 풀리지 않은 새 문제에만 의식이 불을 켠다는 거야.

철수: 일상 말고, 좀 더 전문적인 예는 없어?

영희: 체스가 좋아. 초보는 말 하나하나의 움직임을 의식적으로 계산하느라 머리가 터질 것 같지만, 고수는 판을 보는 순간 좋은 수가 보여. 오랜 학습이 의식적 계산을 몸에 밴 직관으로 바꿔 놓은 거지. 그래서 고수도 처음 보는 변칙 수 앞에서는 다시 오래 생각해.

철수: 비유하자면?

영희: 신입과 베테랑이야. 10년 차는 평소엔 손이 알아서 일하지만, 큰 사고가 터지면 순식간에 눈이 번쩍 뜨이지. 의식은 새로움을 알려 주는 경보등 같아. 늘 켜져 있는 전등이 아니라, 낯선 일이 생길 때만 울리는 경보등 말이야.

 

2. 과학이 그린 세계에는 색깔이 없다

철수: 그런데 과학이 이렇게 잘 설명하는데, 왜 마음은 못 찾는 거야?

영희: 슈뢰딩거의 가장 날카로운 지적이 여기 있어. 이른바 '객관화의 원리'야. 과학이 객관적일 수 있었던 건 세계를 관찰하는 주체, 곧 우리 자신을 그림에서 빼 버렸기 때문이라는 거지.

철수: 우리를 뺐다고?

영희: 자연을 연구하려면 '보는 나'를 떼어 놓고 대상만 남겨야 했거든. 덕분에 정밀해졌지만 대가가 있었어. 색, 소리, 따뜻함 같은 감각도 같이 사라진 거야. 물리학이 말하는 빨강은 파장 약 650나노미터의 전자기파고, 음악은 공기의 압력 변화이고, 따뜻함은 분자의 평균 운동에너지일 뿐이야.

철수: 그 파장이 왜 '빨간 느낌'인지는?

영희: 거기엔 답이 없어. 눈에서 뇌까지 신경 신호를 끝까지 추적해도 그 안에서 빨간 느낌은 발견되지 않거든. 색맹인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어. 같은 빛이 들어와도 경험이 다르잖아. 경험은 빛 자체가 아니라 그걸 겪는 존재에게 달려 있다는 뜻이야.

철수: 초상화에 화가가 안 그려진 셈이네.

영희: 맞아. 화가는 그림 밖에 서 있으니까. 지도에 비유해도 좋아. 지도에는 길과 강이 정밀하게 그려져 있지만, 그 지도를 펼쳐 놓고 보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 관객 없는 극장도 마찬가지야. 무대와 조명이 완벽해도 보는 사람이 없으면 연극은 누구에게도 일어나지 않잖아. 마음이 안 보이는 건 과학이 틀려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마음을 빼고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야.

철수: 그럼 과학이 틀렸다는 거야?

영희: 그건 아니야. 슈뢰딩거도 객관화가 과학의 성공 비결이라는 건 인정해. 문제는 그 그림 안에서 마음을 찾으려는 시도야. 눈은 모든 걸 보지만 자기 자신은 못 보잖아. 안경도 마찬가지로 세상을 선명하게 보여 주지만 안경 자체는 시야에서 사라지지. 마음도 세계를 보는 도구라서, 보이는 세계 안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거야.

3. 마음은 여럿이 아니라 하나다

철수: 그럼 마음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설명해?

영희: 여기서 슈뢰딩거가 파격적인 주장을 해. 우리는 '나의 마음', '너의 마음'처럼 마음이 여러 개라고 믿지만, 세계는 하나뿐이잖아. 우리는 같은 나무를 함께 보고 같은 소리를 함께 들으며 대화해. 내 눈앞의 세계와 네 눈앞의 세계가 따로 둘이라고 증명할 방법은 없어. 그는 이 모순을 '산술적 역설'이라고 불러.

철수: 마음이 하나라니, 나랑 너는 생각이 다른데?

영희: 같은 영화를 봐도 감상이 다르듯이, 같은 산도 서로 다른 마을에서 보면 다르게 보여. 한쪽에선 뾰족하게, 다른 쪽에선 완만하게. 보는 자리가 달라 경험이 다른 거지 산이 둘인 건 아니야. 꿈도 비슷해. 꿈속에는 여러 사람이 나와서 서로 다른 말을 하지만, 결국 모두 한 사람의 마음에서 펼쳐진 거잖아.

철수: 그 생각은 어디서 온 거야?

영희: 슈뢰딩거는 인도 베단타 철학의 '아트만과 브라만은 하나'라는 통찰에서 이 생각을 끌어와. 의식이 여럿인 것처럼 보이는 건 겉모습일 뿐이라는 거야. 우리말로 하면 '불이(不二)',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는 뜻이지.

철수: 너무 신비주의 같은데, 근거가 있어?

영희: 슈뢰딩거도 그 점을 알아서 조심스러워. 이건 실험으로 증명한 결론이 아니야. 내 의식은 오직 나의 경험으로만 알려져 있는데 세계 그림은 모두에게 하나로 겹친다는, 두 사실 사이의 모순을 풀려는 철학적 제안이지. 확정된 이론이 아니라 사유 실험으로 읽는 게 맞아.

철수: 마음이 하나면 왜 나는 네 생각을 못 읽어?

영희: 내 해석으로는, 몸과 뇌와 기억이 따로 쌓이면서 보는 자리가 갈라지기 때문이야. 두 마을 사람은 서로의 시야를 못 보지만 같은 산을 보고 있잖아. 시점은 나뉘어 있어도 바라보는 대상까지 둘로 갈라지는 건 아니라는 거지.

                                                                                  [하나의 산, 두 마을]

4. 정리: 철수와 영희의 결론

철수: 정리하면 이런 거네. 의식은 새로운 것 앞에서 켜지고, 과학은 마음을 빼고 그린 그림이고, 마음은 어쩌면 하나일 수 있다.

영희: 맞아. 그래서 슈뢰딩거는 "마음이 물질에서 나왔다"고도, "물질이 마음에서 나왔다"고도 단정하지 않아. 물질과 마음을 둘로 나눠 놓은 우리의 방식 자체를 의심해 보라고 권하는 거지.

철수: 그런데 물리학자가 왜 하필 마음을 파고들었을까?

영희: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으로 유명한 사람이잖아. 양자역학에서 관찰과 측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지. 물질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 사람이 결국 그 물질을 알아보는 '앎의 주체'를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거야. 자연을 끝까지 파고들면 자연을 바라보는 우리 자신과 만난다는 뜻이기도 해.

철수: 요즘 의식 연구에도 닿아 있겠다.

영희: 그렇지. 뇌과학은 의식과 함께 활동하는 뇌 영역을 꽤 찾아냈지만, 왜 그 활동에 '느낌'이 따라붙는지는 여전히 남아 있어. 철학자 데이비드 차머스가 1995년에 '의식의 어려운 문제'라고 이름 붙인 바로 그 틈이야. 슈뢰딩거는 그보다 40년 앞서 같은 틈을 짚었던 셈이지.

철수: 읽을 때 조심할 점은?

영희: 책의 앞부분, 곧 의식과 학습의 관계나 객관화의 원리는 지금도 곱씹을 만한 통찰이야. 하지만 '마음은 하나'라는 뒷부분은 검증된 과학이 아니라 철학적 입장이라는 점을 구분해서 읽어야 해. 답을 주는 책이라기보다 질문을 정확하게 만들어 주는 책이거든.

철수: 우리 일상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영희: 익숙해질수록 의식이 잠든다는 점이 힌트야. 같은 길, 같은 일상만 반복하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가잖아. 낯선 길로 걸어 보고 새로운 걸 배울 때 의식이 깨어나고, 삶이 더 또렷하게 느껴져.

한 줄 요약: 과학이 마음을 설명하지 못하는 건 무능해서가 아니라, 마음을 그림 밖에 세워 두었기 때문이다.